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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I PRO REGNO VERITATIS IUSTITIAE ET CARITATIS
- THE TRUTH SHALL MAKE US FREE -
- THE JUSTICE SHALL MAKE US TRIUMPHANT -
- THE LOVE SHALL MAKE US CONSUMMATE -
- THE KINGDOM OF THE LORD WILL THUS COME TO US -
OPENING THE LIGHT TO THE WORLD
50th
Homage to Dr. Synn Ilhi 50th Academic Jubileum
행소 신일희 박사 교육희년기념
열어온 날과 일
- 개척과 봉사의 계명 정신을 살다 -
6.25 동란 직후인 1954년 생선 운반선을 타고 정든 고향을 떠난 15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4주 만에 도착했던 미국 동부의 켄트고등학교.
그는 학생 중 유일한 유색인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4년 후 학교가 주는 최우수상인 컬럼비아 컵을 받으며 졸업합니다.
이후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하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의 부모님께서 소개해 주신 아리따운 아가씨 박병희를 만나 가정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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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의 행소 신일희 박사
켄트 '컬럼비아 컵' 수상
트리니티 대학 졸업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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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립대학교 퀸즈대학 교수 (1966-1971)
첫 직장은 뉴욕시립대학교 퀸즈대학이었습니다.
그간 대출한 학자금을 갚으며 보냈던 첫 5년.
이는 행소가 고등교육계에서 보낸 50년 교육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과 독일에서의 교수 생활을 거쳐 1972년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초대 학과장으로 귀국했던 그는 1974년 아직 30대의 젊은 교수로 개교 20년 된 계명대학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대구를 떠난 지 2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당시 계명대학은 지방의 조그마한 사립대학이었습니다.
이후 4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계명과 오랜 동행을 하게 되지만 그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계명대학과 종교단체가 가졌던 고등교육의 기능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개교 초기 아담스 학장 때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기획실장으로 재정 확보와 시설 확충은 물론 한강 이남 최고의 교수진 확보를 위해 일하던 행소는 1978년 계명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고 경영자로서 56만 평 성서캠퍼스를 구축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됩니다.
대명캠퍼스를 팔지 않고 막대한 재정적인 투자를 감당하려는 어려운 목표를 관철시키며 1979년 성서캠퍼스 신축공사에 착수했고, 학문적 탁월성의 상징이 된 계명비사상 제도를 제정, 1979년 2월 그 첫 수상자를 배출합니다.
동산병원과의 통합과정에서도 교계와 일부 구성원들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끈질긴 설득으로 1980년 통합에 성공, 의과대학을 신설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1982년 군부정권의 압박으로 대학은 경영권을 빼앗기고 총장은 강제 사퇴하게 됩니다.
외부인과의 접촉조차 감시되던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행소는 교실로 돌아가 인문학이 이루어야 하는 수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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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중인 행소의 논문
(제자 김성렬 교수, 74학번)
처음 뵌 인상은 아주 범접하기 어려운 귀족적인 교수님. 딱 이런 정도였습니다.
우리 모든 제자들이 많은 은혜를 입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프거나 몸이 약한 제자에게는 약을 전하시고, 유학 가는 제자에게는 여비도 전하시고...
아픈 제자에게는 약을, 유학 가는 제자에게는 책값을.
호텔에 데려가 서양식 식사예절까지 가르쳤던 행소.
(제자 최윤영 전국공무원노조 국장, 81학번)
84년도에 독문과 81학번 김형준 동문하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막걸리 값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삼덕동에 있는 선생님 자택으로 갔는데 대문이 닫혀있어서 월담을 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현관문을 두드려서 선생님께서 나오셨는데 저희를 서재로 안내하셨고 거기서 양주 한 병을 주셨어요. 술을 안 드시는데. 새벽까지 제자들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셨죠. 새벽 3시가 넘었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승용차로 저희 자취방까지 데려다주셨죠. 선생님과 저희 제자들 간에는 격의가 없었습니다. 운동도 잘하셨고, 유머도 대단히 많으셨고, 그래서 80년대의 제자들이 기억하는 선생님은 어렵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격의 없었고, 다 대화를 나누었고...
당시 제자들은 학자이자 스승으로서의 행소를 가까이서 만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6년의 세월이 지날 무렵, 계명대학교는 4대 총장으로 다시 행소를 임명합니다.
그는 학교의 지속적인 계획을 실천에 옮겨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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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ula Rasa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 까지'
질적인 성장
1998년 전국 최초로 교수 연봉제를 채택하여 학문적 탁월성을 추구했고, 그해 대학종합평가에서도 우수대학으로 지정. 각종 국책사업을 유치하며 학교의 내실을 다져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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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캠퍼스 구축
행소의 학창 시절 노트
한편 행소가 학창 시절부터 키워왔던 건축과 예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재능은 이후 계명의 자랑거리가 된 건물들에 녹아나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아담스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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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촌 건축 총괄 이중우 교수
지역의 명소가 된 계명한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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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빈 방문(2015년 4월 13일 자 연합뉴스)
국제적인 전시를 유치하는 행소박물관
명실공히 공연문화행사의 중심이 된 계명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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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산도서관장 김남석 교수
행소가 70년대부터 골동품상 뒷골목을 다니며 부지런히 사 모은 고문서들 덕분에 동산도서관은 서울대 규장각 다음으로 많은 국가문화재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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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보물 제 1463호)
건물 한 동,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모두 제 자리가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
그의 주도하에 지어진 수려한 캠퍼스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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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의 신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이 선정한 동문 100인(2001)
명예박사학위
러시아 - 세인트피터스버그 국립대학교(1996)
미국 - 트리니티대학 (1991), 롱아일랜드대학교(1996)
대만 - 국립사범대학교(2000)
일본 - 도산학원대학(2002), 류큐대학교(2004)
독일 대십자 공로훈장 (독일 정부, 2011)
폴란드 문화 훈장(폴란드 정부, 2008)
5.16 민족상(대한민국 정부, 2007)
폴란드 대십자 훈장(폴란드 정부 , 2000)
특유의 지성과 매력, 헌신된 삶으로 얻은 국제사회의 신임을 통해 국제적인 기관들과 계명대와의 파트너십을 구축하였는데, 중국 정부가 설립한 공자 아카데미에서는 중국인 외의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본부 이사직을 수행하였고, 계명쇼팽음악원을 설립, 국제적 위상의 쇼팽 피아노 콩쿠르도 이미 3회째 계명대에서 공동 개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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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대통령 방문(2002)
일찍이 비전을 가지고 키운 한국학 연구원이 발행한 논문집은 2012년 스코퍼스에 등재.
2014년에는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을 설립하여 다가올 시대의 문화적 지각변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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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대학교 총장실에서
교직원들의 매월 급여 1% 기부금으로 결성된 1% 사랑나누기 운동을 통해 기부문화 정착에 앞장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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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나누기'서약식(2004)
학생들의 해외봉사활동을 전폭 지원하였으며, 2003 유니버시아드와 2011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는 선수촌장으로 봉사하였고,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민간외교의 장으로 끌어들인 대구경북국제교류협의회 모임을 결성하는 등 계명 정신을 지역사회봉사의 영역으로 확장해 왔습니다.
계명이 태어난 정신적인 뿌리를 기억하는 행소는 2014년 제중원이 시작된 1899년을 계명대학교의 설립연도로 선포함으로써 계명의 역사적 위상을 공고히 하고, 개척정신과 봉사정신으로 시작된 계명의 초심을 계명의 구성원들과 사회에 다시 일깨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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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계명이 있기까지 개척과 봉사의 정신을 이어오신 분 선배 학자이자, 비전의 선포자로, 열정적이고 헌신된 동역자로, 청지기의 삶을 살아오신 행소 신일희 박사님
[2013년 신입생 대상 특강]
이것이 하나밖에 없는 여러분의 모교 계명대학교입니다.
세계인들이 말하는 최고의 대학이 아닐 수 있겠죠. 세계에서도 아닐 수 있고, 대한민국에서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대학. 그 정신을 여러분이 이어받아서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 되세요. 아까 얘기한 대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존재 속에 무슨 값진 것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4년 동안 허송세월 하지 말고 그것을 찾으세요. 공붓벌레가 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들어있는 본질이 무엇인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낼 때 여러분은 그때 비로소 어깨 펴고 고개를 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가치.
자기 스스로를 하나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학생이 있다면, 제자가 있다면, 우리 900명의 교수님들은 우리의 생애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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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동안 오직 고등교육과 계명대학교의 발전을 위한 일념으로 달려오신 행소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고등교육계에서 보내신 교육 5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영상: 이태희 / 시나리오: 신채기 / 나레이션: 김현애
행소신일희박사 교육희년기념 동영상(Intro) - 12분 27초
행소신일희박사 교육희년기념 축하메세지 - 4분 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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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e Ziolkowski 테오도르 치올코프스키. 프리스턴대학교 대학원 전 원장, 독일 비교문학 명예교수, 신일희박사의 은사
나는 시간일 갈수록 일희의 품성에 더욱 감탄한다. 일희는 훌륭한 아버지의 헌신적인 아들, 교양 있는 부인의 헌신적인 남편, 사랑스럽고 재능있는 세 자녀의 헌신적인 아버지, 그리고 시간과 거리를 초월해 한결같은 우정과 의리를 보여주는 나의 벗이다.
瀬名波榮喜 세나하 에이키. 메이오 대학교 명예총장
신총장님이 오키나와를 떠나실 때 나하 공항에서 잇었던 일입니다. 무심코 신총장님은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얻으리라 I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라고 어린 시절을 상기하고 영원을 깨닫는 시의 구절을 줄줄 암송하셔서 위즈워스를 연구하고 있는 저를 깜짤 놀라게 하셨습니다.
許琳 쉬린. 중국 한판(교육부) 주임, 공자아카데비 본부 총간사
총장님은 중국과 서양을 두루 섭렵하시어 지극히 겸손하시면서 사려가 깊으시고 지혜가 출중하시며 간결한 언어로 명확한 의사를 표현하시는 분으로 제가 만나 본 적이 별로 없는 대교육자이십니다. 저는 총장님을 통해 한국 엘리트계층의 우수한 품격과 정신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Ryszard Zimak 리샤르트 지막. Rector of the Fryderyk Chopin University of Music (국립쇼핑음악대학교 총장)
신총장님은 내가 만난 여러 분들 중 가장 비범한 분이다. 신총장님은 예술가이고 음악가이며 지휘자이다. 우리 폴란드인과 유럽인의 관점에서 볼 때 신총장님은 만능인 르네상스적인간 같다. 총장님의 학식, 성실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도주의는 동시대인 뿐 아니라 후세대도 따라야 할 귀감이다. 사람은 국적과 상관없이 그러한 역할모델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학자이자 스승,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훌륭한 인간을 필요로 한다.
Adkham Bekmuradov 아드캄 베크무라도프. 우즈베키스탄공화국 재정금융대학교총장, 계명대 명예박사
나는 신총장님이 철학자이고, 선생이자 교육가임을 알게되었다. 우리가 우정과 협력에의 의지를 나눌 때마다 나는 신총장님에게서 관대한 지혜, 빛나는 지성, 광대한 지식, 진실한 마음을 본다. 이 세상의 어떤 말도 이 분을 표현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둔 총장님의 자녀가 부럽고, 이런 형님이자 친구를 둔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 前 국회의장
어쩌면 계명대학교 교석인 라피스라줄리는 르네상스형 세계시민인 신일희박사와도 잘 어울리는 보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맑은 리더십과 따뜻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다.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행정가로서, 문필가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신일희 총장은 우리 사회가 '큰 바위 얼굴'로 삼기에 손색없는 사람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표상이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쓰임을 받은 기독교 사학(私學)의 청지기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소임과 소명을 다 바친 삶이었다
정정길.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전 울산대학교 총장, 전 대통령실장
신일희 총장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깨끗하고 격조 높은 학 같은 옛날 선비가 떠오른다. 우리가 존경하고 모범을 삼는 훌륭한 옛 선비들은 그런 모습이리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면서 말을 조심하게 된다. 여러 사람들이 회합을 하게되면 신 총장님 때문에 품위있는 모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대순. 한국대학총장협회 이사장, 한국대학법인협의회 회장
Global시대에 계명대학교는 아시아의 선도대학으로 이미 우뚝 솟아있다. 계명대학교가 한국대학교육의 선도대학으로, 대학조경 최우수대학으로, 나아가 아시아의 선도대학으로 발전되어 온 과정에는 한 지도자의 선견지명과 Vision, 그리고 헌신과 봉사적 Leadership이 있었던 것이다.
류우익.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육군사관학교 석좌교수, 전 대통령실장, 전 통일부장관
신일희 총장님은 내 기준으로 보면 교육계와 영남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시다. 늘 조용하셔서 꼭 해야 할 말씀만 하셨지만,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정곡을 찌를 뿐만 아니라 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와 온화한 미소로 회의장을 감싸 안으시어서 그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 이미 큰 역할을 하셨다.
김영환. 홍익대학교 총장
한번은 전국대학총장회의에서 대학의 기여 입학 문제에 관해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안건이 통과될 상황에 처했는데, 신일희 총장님께서 앞장서서 뜻을 관철하셔서 1991년부터 시작된 이논의가 결국 2005년에 불가한 것으로 확정될 수 있었고 우리나라 대학입시의 공정성이 훼손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문희. 대주교, 전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한번은 신일희 총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톨릭대학은 대구 동편에 있고 우리는 서쪽에 있습니다. 두 대학이 꾸준히 노력하면 대구에도 훌륭한 정신이 활발해지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Mission School의 이념 실현을 일시도 잊지 않으시고 계시는 신 총장님으로부터 마음속 깊이 박힌 신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울특별시장 박원순
안녕하십니까. 서울특별시장 박원순 입니다.
제가 평소 존경하는 신일희 교수님의 대학교육 50년, 희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무려 50년입니다. 반세기에 해당하는 이 시간 동안 신일희 총장님, 신일희 교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선생님', ‘스승’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해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계명대학교를 우리 대학 교육의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고, 여러 석학들과의 깊고 넓은 교류로 우리 대학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위상도 높여 오셨습니다.
50년 동안 교수님이 우리 사회에 보여 주셨던 헌신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집사람이) 아내가 계명대학교를 나왔습니다.총장님 덕분으로 제가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내일과 우리 대학의 발전을 위해 든든한 지침과 길잡이가 되어 주십시오. 존경하는 신일희 교수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